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콘스탄티노스 11세 (문단 편집) === 즉위 이전 === [[팔레올로고스 가문]] 출신. 별칭은 '''드라가시스(Δραγάσης)'''로 [[엘레니 드라가시|어머니]]가 세르비아의 드라가슈(Dragaš) 가문 출신이라 붙은 별칭이다. 팔레올로고스라는 성보다도 어머니의 성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마누일 2세]]와 [[엘레니 드라가시]] 사이에서 8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그중 둘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으므로 장성한 황자 중 4남에 해당했다. 콘스탄티노스의 성장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상당히 적은데, 가끔 '[[포르피로게니토스]](Πορφυρογέννητος)'로 묘사되는 걸 보아 블라헤르네 궁전의 자주색 산실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사냥과 승마, 무예에 소질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몇 가지 기록으로 볼 때 모험심과 활달함, 용기를 갖춘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장남 [[요안니스 8세]]는 차기 후계자로 지명된 상황에, 차남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와 삼남 안드로니코스는 각각 [[모레아 전제군주국|모레아]]와 테살로니키의 [[데스포티스]]로 임명된 상황이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워낙에 적었기 때문에 어린 콘스탄티노스는 할당된 영지 없이 당분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무르게 되었다. 1422년 6월, 당시 17세의 소년이었던 그는 [[무라트 2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을 경험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마누일 2세]]와 차기 후계자인 [[요안니스 8세]]의 공동 황제 통치 시기였다. 결국 오스만군은 해가 가기 전 철군했지만, 이 공성전이 크나큰 스트레스가 되었는지 공성전 기간 중인 9월에는 부황 마누일 2세가 뇌졸중으로 반신 마비를 겪기도 했다. 다음 해 여름에는 튀르크의 공세에 시달리던 안드로니코스 [[데스포티스]]가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인]]들에게 영지인 [[테살로니키]]를 넘겨주었는데, 7년 후인 1430년 3월 29일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술탄국에게 함락된다. [[요안니스 8세]]의 치세기 동안 콘스탄티노스는 황제를 대리할 섭정직을 두 차례 맡았다. 당시 [[요안니스 8세]]는 서방 세계의 도움을 얻기 위해 몸소 서유럽으로 찾아가 동서교회 통합을 추진했는데, 이 때문에 황제가 부재할 동안 수도를 관리할 섭정이 필요했다. 첫 번째는 1423년 11월부터 이듬해 11월 초, 그가 18세 ~ 19세 때의 일로 이것이 그가 맡은 최초의 정치적 직무였다. 두 번째 섭정기는 1437년 11월 말에서 1440년 2월까지였다. 이 두 차례의 섭정기를 통해 콘스탄티노스는 후사가 없던 [[요안니스 8세]]를 이을 후계자로 잠정적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요안니스 8세는 자신을 제하고선 출생 서열이 제일 높은 차남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테오도로스]]보다 사남인 콘스탄티노스를 신임했고, 사이도 서로 좋았다. 이 총애가 꽤 노골적이었는지 자신을 차기 황제로 여기고 있던 테오도로스는 콘스탄티노스와 자주 갈등을 빚었다. 이 후계 갈등은 후일 콘스탄티노스가 수도 인근에 자리한 자기 영지를 테오도로스의 모레아와 맞바꾸면서 어느 정도 봉합되었고, 요안니스 8세의 서거 몇 달 전 테오도로스가 먼저 사망하면서 완전히 종결된다.] 1428년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제국의 [[번국]]인 [[모레아 전제군주국]](Despotate of the Morea)의 군주가 되었다. 모레아 [[데스포티스]] 시절에 [[라틴]]계 [[아테네 공국]], [[아카이아 공국]] 등을 격파하고 흡수함으로써 [[그리스]] 남부의 경쟁 세력을 모두 격파하고 1443년에 이르면 [[베네치아 공화국|베네치아]]의 식민지 일부를 제외한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 지역과 [[아티키]]의 상당수를 세력권에 넣었다. 그러나 이를 경계한 [[무라트 2세]]의 대군에 의해 영토를 모조리 토해내야 했으며,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입구인 [[코린토스]] 지협에 모레아 전제군주국이 세운 제국판 만리장성인 헥사밀리온이 함락되고 모레아까지 황폐화되었다. 44살이 되는 1448년에는 맏형인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8세]]가 후사 없이 사망했고, 동생인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디미트리오스]]와 제위 계승 분쟁이 있었으나 오스만 술탄 무라트 2세의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거기에 대관식조차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니라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수도 미스트라에서 치렀는데, 이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닌 지방 도시에서 즉위식을 올린 황제는 몇 명 있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즉위식을 올리지 않았기에 일부에선 그를 정통황제로 보지 않는 시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라틴 제국]]을 없애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미하일 8세는 니케아에서 즉위했고, 1341년부터 1347년까지의 내전 중에 즉위한 요안니스 6세는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즉위하는 등 동로마 제국 역사에는 이와 비슷한 전례가 존재했다.] 콘스탄티노스가 예외적이었던 것은 그들은 모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다시 한번 즉위식을 거행했던 반면, 콘스탄티노스에겐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데 이는 동서 교회의 통합 문제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노스는 로마 교황의 군사적 지원을 얻고자 동서 교회의 통합을 꾀했고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도 그에 동조적이었으나, 그걸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성직자들도 많았다. 교단 내에서까지 배척받는 총대주교에 의해 대관식을 받을 경우, 콘스탄티노스는 즉위하는 순간부터 정치적 위기에 직면할 확률이 높았다. 한참 뒤에 반발이 줄어들거나 교회 일치는 없던 일로 한다는 어명이라도 떨어졌더라면 성 소피아 성당에서의 대관식도 가능했을 테지만, 그전에 동로마가 멸망해서 콘스탄티노스 11세에게는 그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이로써 멸망을 앞둔 로마의 운명을 대변하듯,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후 유일하게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지 못한 동로마의 황제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